민주노동당의 시름이 짙다. 민주노동당 내부의 해묵은 갈등이 대선 참패 이후, 격화되며 폭발 직전까지 치닫고 있다. 한쪽에서는 분당 얘기까지 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쟁통에 분당은 공멸'이라며 예의 단결론을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29일 중앙위원회를 열어 '심상정 카드'를 통해 위기에 처한 당 수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도 녹녹치 않았다. 사실상 '전권 위임'과 '종북주의 청산'을 평등파 쪽에서 요구하고 나섰으나, 당권을 장악하고 '종북'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자주파가 이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기란 애초부터 만무했다.
당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고, 대선 참패 이후 안팎의 화살이 다수파인 자주파를 겨냥하고 있어 이들이 한 발 물러서 봉합 국면에 들어설 것이라는 평등파 쪽의 기대 섞인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자주파는 기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들로서는 기득권을 내버리기도, '종북주의 청산'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기도 쉽지 않았던 것. 오히려 자주파는 '당에 종북주의는 없다'거나, '평등파가 다수파일 때는 패권주의가 없었냐'며 맞불을 놓았다.
새삼스럽지 않은 민주노동당의 '반진보적' 행보들
'분당론'이 표면화 된 것은 최근이지만, 이미 민주노동당 분당 '시그널'은 곳곳에서 감지됐다. 당 내 평등파 일각에서는 '당을 접수하든, 아니면 우리가 나가든지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또 당 진로에 회의를 느낀 당원들의 개별적 탈당 또한 가속화되고 있다. 지난 해 11월부터 민주노동당은 창당 이래 처음으로 입당자 보다 탈당자가 많은 당원 감소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현재 평등파 일부는 분당론의 근거로 자주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를 주요한 이유로 들고 있다. 당권을 장악한 자주파의 입김이 일방적으로 반영돼 북핵문제 등에 있어 '종북적', '민족지상주의적' 태도로 일관해 진보정당으로서의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 핵실험으로 한반도에 위기가 고조되던 지난 해 10월, 민주노동당 일각에서는 자주파를 중심으로 '자주적 핵무장론'까지 튀어나왔다. 또 2005년에 독도 영유권 문제가 논란이 되었을 때는 '독도 개발과 군대 주둔'이라는 당 공식 성명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는 '자주'라는 미명 아래 감춰진 민주노동당 자주파의 민족지상주의적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외에도 '동성애는 자본주의의 파행적 현상'이라는 정책위의장의 발언과 대선 기간 중 '한국노총 사과' 건 등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한편, 자주파의 패권주의적 행태와 관련해 조승수 전 의원(현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은 "당내 다수파를 이루기 위해 어떤 지역에는 그곳에 살지도 않는 대학생들까지 전입시키고 대의원으로 선출하는 조직 장악 행태를 보였다"고 비판했다.
'종북주의' 때문에 분당?
당의 '반진보적' 행보에 대한 평등파 내부의 불만은 그 어느 때보다 드높지만, 당장에 분당으로까지 치닫을 지는 아직 미지수다.
우선 분당을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종북주의' 그리고 '패권주의'만으로는 정치적 명분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이제서야 '종북주의' 논쟁이 수면 위에서 불붙기 시작했지만, 창당 이후 지금껏 노동운동 중심의 평등파와 통일에 방점을 찍고 있는 자주파 간 갈등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민주노동당은 이처럼 물과 기름과 같은 두 세력이 한 이불을 덮기로 합의하고, 창당됐다. 노선 상의 차이에도 두 진영이 공존하기로 한 것은, 흔한 말로 창당정신이었던 것.
때문에 이제 와서 '종북주의가 문제이니 분당해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종북주의가 있었는데, 왜 한 이불을 덮었느냐'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평등파가 자기반성 없이 '종북주의'를 내세워, 분당으로 내달리기 어렵게 만드는 지점이다.
또 평등파가 자주파의 '종북적', '민족지상주의적' 경향을 정치력으로 제어하지 못한 자신들의 '정치적 무능'을 먼저 탓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대북 문제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비정규직 문제 등 민생현안과 관련해 정치적 명분이 있었다면, 왜 이를 제대로 관철시키지 못했냐는 비판이다.
노동운동진영 일각에서 해체대상으로까지 거론되는 한국노총와의 정책연대 추진을 단순히 자주파의 입김에서 비롯된 해프닝으로만 얘기할 수 있을까. 올 초 국민연금 개정 국면에서, 기초연금을 추진한다며 한나라당과 손잡았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을 자주파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평등파가 자신들의 정치력 부재에 대한 문제를 자주파의 '패권주의'로 환원시켰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분당, 때가 아니다".. 현실론도 있어
한편, 분당론이 고조되고 있지만, 평등파 내부에는 당 잔류와 내부에서의 혁신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민주노동당 위기를 수습할 해결사로 몸값이 치솟고 있는 심상정 의원도 "지금 시점에서 분당을 거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당내에서 좀 더 성실한 실천과 노력의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조승수 전 의원 등이 제기하고 있는 분당 주장에 선을 긋고 있다.
잔류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분당의 명분도 명분이지만, 현실론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지금은 위기에 봉착해있지만, 어쨌든 민주노동당은 원내에 진출한 유일한 진보정당이다. 또 당권으로부터 소외되어있지만, 여전히 평등파는 절반에 가까운 당원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한 축이다. 게다가 평등파는 심상정, 노회찬 등으로 대표되는 '스타의원'들까지 배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을 깨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기란 위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심상정 의원처럼 당내 지분을 점유하고 있는 '스타'급 정파 수장이 '분당'으로 방향타를 돌리기란 더더욱 쉽지 않아 보인다.
때문에 민주노동당 분당은, 당내 평등파와 훗날을 도모할 세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이상 불가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른바 범좌파 세력 결집을 통한 좌파 신당 창당의 상이 범좌파 진영 내부에서 일정하게 공유되지 않는 이상, 당내 평등파가 '고난의 행군'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민주노동당 외곽에는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러 개의 좌파정치조직들이 있다. 원내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사회당도 있고, '노동자의힘'을 비롯한 다수의 좌파정치조직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산개된 형태로 존재하고, 같으면서도 이질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특히 정당 건설에 대한 인식 차는 현저하다.
민노 평등파, 당 외곽 좌파세력과 공감대 형성될까
당내 평등파가 당 외곽의 한국사회당과 '노동자의힘' 등 좌파세력들과 '큰일'을 도모하기란 '종북주의' 세력과 한 이불을 덮기보다도 쉽지 않다는 지적이 우세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현재 민주노동당 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분당론과 관련해 최광은 한국사회당 전 대변인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분당시나리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보다 큰 판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 같다"며 "(민주노동당 평등파의) 진보진영 전체의 혁신에 대한 구상이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단순히 세력 갈라치기가 아니라, 프로그램과 내용을 중심으로 한 연합이라면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고 이른바 좌파연합 가능성을 열어뒀다.
최 전 대변인은 특히 좌파연합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 "당장 조직당원들의 공식 논의가 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고, 속도도 늦을 것 같다"며 "일단 논의의 단초를 마련하기 위해 당 내 개인들을 중심으로 포럼형식의 모임을 1월 초부터 가동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또 그는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과 김형탁 전 대변인 등과의 만남도 빠른 시일 안에 추진해 논의의 단초를 열어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만일 좌파 신당 창당을 두고 당 안팎의 좌파세력들이 교집합을 형성한다면, 민주노동당의 분당 논란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개될 여지도 있다.
'안에 있어도 시베리아, 나가면 더 추운' 평등파의 선택은?
지난 3월 손학규 전 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할 때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당시 "안에 있어도 시베리아지만, 밖에 나가면 더 춥다"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현재 당내 평등파가 처한 상황도 딱 그렇다. 평등파의 한 관계자는 "분당론이 거세긴 하지만 분당 이후의 상이 그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쉽사리 분당이 가시화될 수 있을지 판단하기 이르다"며 "만약 당 밖의 좌파세력들과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오히려 분당이 급물살을 탈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분당은)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손학규 전 지사에게 연신 러브콜을 보냈던 범여권은, 손 전 지사가 탈당하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당 바깥에서 '비빌 언덕'이 있었던 게 손 전 지사의 탈당 결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어느 쪽 '시베리아'를 개척할 지는 민주노동당 평등파의 주체적 의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손 전 지사 탈당 사례와 마찬가지로, 당 외곽의 '좌파 신당 창당' 논의의 진척 정도에 따라 그 여부가 판가름 날 가능성도 높다.
'패싸움'은 더욱 치열하게, 문제는 컨텐츠
민주노동당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에 있어 '패권주의'는 언제나 화두다. 누구나 지양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지만, 그 만큼 이로부터 자유로운 세력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고상한 수식어를 떼어버리고 나면, 정치는 '패싸움'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정치는 총칼 안 든 '패싸움'이다. 이것의 부정적 의미가 집약된 표현이 패권주의이다.
문제는 무엇을 주제로 '패싸움을 할 것인가'인데, 현재 민주노동당의 '파이팅 이슈'는 보수정당들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다. 하나는 당권이요, 또 다른 하나는 종북주의다. 보수정당의 화두로 바꿔본다면, '공천권'과 '친북' 논란쯤이 되겠다. 이게 분당까지 치닫는 패싸움이 될 만한 이슈인지는 민주노동당의 구성원들이 판단할 몫이겠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패싸움'은 더 치열해져야 하고, 그 주제는 더욱 급진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하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단순히 당권, 이미 조선일보조차 다 알고 있는 '종북'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의 삶에 직결되는 문제에 대한 보다 치열한 논쟁이 필요한 시점이다.
역설적이게도 민주노동당이 최대 위기에 봉착한 지금, 여론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분당이든, 내부 혁신이든 진보정당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기도 한 셈이다.